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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아이들 (Kim Il Sung’s Children)

02/17/23       김창길 목사

김일성의 아이들 (Kim Il Sung’s Children)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의 각본, 저자이면서 감독인 김덕영과 편집인 임수영께서 지난 1월 27일- 29일 사이에 개신교수도원에 유하면서 자정이 넘도록 데이빗 하목사님, 기자, 감독, 편집인, 수도원 원장 그리고 필자와 함께 진지한 논픽션 “김일성의 아이들”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동구권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삼키며 애처로운 북한 전쟁 고아에 대한 동정과 아픔에 오랜 시간 사로잡히곤 했다.

이 다큐는 Amazon Prime 에서 영어자막과 일본어 자막으로 볼수 있다. 김덕영 감독은 15년동안 자료 발굴과 조사를 위해 동유럽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거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등 5국의 문서 보관소와 북한 전쟁 고아들이 머물렀던 학교, 기숙사를 답사하며 인터뷰를 진행함으로 드디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10만명의 전쟁 고아들이 발생했다. 남과 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 고아 문제를 다루었다. 남한은 전쟁 고아들을 해외 입양이라는 방식으로 미국과 서유럽에 이주 시켰다면 북한은 전쟁 고아를 동유럽 나라에 분산 수용하는 위탁교육을 사용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동구권이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나라를 돕는 일환으로 김일성의 위탁교육에 협조하게 독려하였다. 전쟁에 대한 공포심과 부모를 잃은 슬픔에 찬 고아들은 불행하고 표정조차 잃은 상태에서 타국에 도착했지만 동구권의 친절한 친구와 교사 그리고 새로운 환경이 그들을 행복한 모습으로 바꾸어 주었다. 조선 전쟁 고아들과 동유럽인들의 만남이 친구가 되어지면서 휴머니즘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통과해 동유럽 국가에 도착한 북한 전쟁 고아들의 모습은 모두들 똑같은 무명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옥색 운동화를 신은 같은 복장이였는데 루마니아 2500명, 폴란드 1000명, 체코 700명, 헝가리 500명, 불가리 500명 이들은 집단 기숙사 생활을 했고 북한에서 보낸 교사가 있어 아침 6시 반에는 기상하여 김일성 얼굴이 새겨진 인공기를 바라보며 경례하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김일성 우상화하는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이 야외 나갈때 “북한에서 온 교사가 없어지면 폴란드 교사들은 자유롭게 놀아라. 평안하게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이 잘쓰는 말 중에는 “가라” “오라” “개새끼” 등 이었는데 집합 시킬 때 쓰던 상급자의 말같다고 현지인들은 말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 전쟁 고아들의 건강을 위해 요리사와 의사를 상주 시켰으며 심지어 호텔을 변경하여 기숙사를 만들어 주었다. 학교에서는 고아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동구권 나라들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작고 큰 전쟁이 200회 있었으며 1948년도에 희랍의 고아 8천명을 유입하거나 7만 고아를 대피시킨 경험이 있어 북한 전쟁 고아에 대한 협력은 비교적 잘 이해 되었지만 때로는 반대하는 국가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축구, 배구 등 운동을 할 때 열띠게 했는데 만일 운동에 지면 죽는 줄 알고 생명을 걸고 했다. 동구권 학생들보다 운동을 더 잘했다고 한다. 이들은 친근하게 대해주는 교사나 이웃들에게 

“엄마”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정이 변해 가족같은 애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루마니아 미술교사 제오르제타 미르초유 (Geogeta Mircioiu)는 19살에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교사로 근무하던 중 당시 북한 고아들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온 조정호씨와 사랑하여 1957년에 결혼하여 1959년 귀국 명령을 받은 조씨와 함께 평양으로 갔으며 귀국후 숙청당해 탄광 노동자로 뿔뿔이 흩어지고 마르초유는 딸 Miran (2세)을 데리고 루마니아로 다시 돌아왔다. 마르초유(87)는 책임성이 강한 신실한 남편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루한사전을 20년에 걸쳐 만들었다. 아직도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린다. 이런 여인이 폴란드에도, 헝거리에도 12명이 된다고 한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후르시쵸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며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하자 동구권에는 자유개방운동이 전개됐다. 이즈음에 김일성이 동구권을 방문하던 중 두명의 북한전쟁고아가 폴란드에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다 잡혀 오는 일이 발생했다. 동구권 북한고아들이 자유개방에 눈을 뜨게 됐다. 본국에서 김일성 정권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이야길 듣고 이때부터 김일성은 주체 사상이라는 것을 만들어 김일성 1인 우상 독재주의를 만든다. 동구권의 문화와 자유에 익숙해진 북한 전쟁 고아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한 김일성은 그후 갑작스럽게 동구권에서 거주하는 북한 전쟁 고아를 비행기편과 기차편으로 급히 귀국시킨다. 이때 일부학생들은 정들었던 동유럽 국가를 떠나기 아쉬워 곳곳마다 돌비석에 이름을 파놓고 떠난다 

북한에서 배달된 편지는 “엄마” 그립다고 하면서 필요한 물건을 부쳐달라고 한다. 원둔천이란 아이의 사망소식은 가슴아프고 충격적이다. 12살된 아이가, 국경을 넘어서 걸어 폴란드까지 오겠다던 아이가 도중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 나이 열살적에 6.25 전쟁이 났다 그때 위탁교육으로 동구권에 끌려 갔던 아이들은 내 나이 또래이다. 피흘리며 삶과 죽음의 전쟁 공포와 부모님을 잃어버린 허망한 세월에 동구라파 까지는 잘 갔지만 이제 그곳에서 정착하여 외로운 철부지들이 성숙하여 십대에 들어서자 그곳 생활에 정착되고 무지하던 그들이 지식을 쌓아가고 약함이 강건해져가며 우정이 애정으로 싹터가는 시기에 사회주의 이념과 김일성 한 사람의 우상화때문에 그 진실하고 희망에 찼던 친구들이 그 무시무시한 공산체제하에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원통하기 짝이 없다. 나도 6.25동란시 부산에 피난가서 아버지는 북한에 납치되어 가고 형들은 군대가고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서울의대에 다니던 둘째형과 함께 사는데 있을 집이 없고 먹을 게 없었다. 안용준선생이 경영하는 고아원에 가면 공부도 할수있고 거처할 곳이 있다고 해서 어머니를 떠나 고아원으로 가겠다고 동생과 내가 결정했던 일이 생각난다. 막상 가려니 가족을 떠나서 살 자신이 없어서 울었다. 우리는 남한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함께 역경을 이겨냈는데 내 또래 친구들은 두번이나 고향을 잃었던 슬픔을 어찌 이겨낼 수 있었을가?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생생한 사진과 영상과 인터뷰를 보면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더더욱이 공산주의로 통일은 절대 안된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통일되는 것 보다는 자유 민주주의로 그대로 사는게 좋다. 공산주의를 경험한 이북서 피난온 선배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알리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절규는 자유를 빼앗긴 경험있는 자들만이 안다.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성숙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다시 나를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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