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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06/12/22       김창길 목사

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1950년 8월 23일 아침 6시 경에 내 나이 열 살 적 일이다. 낯선 젊은 청년이 문을 열면서 “여기가 목사님 댁이냐?” 하면서 “김동철 목사님이 계시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나가시고 안 계시는데요 아마 조금 있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실 겁니다.” 청년은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다닥다닥 붙어서 사는 동네 집에서 잠 깨 나온 또래들과 다방구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6.25 전쟁이 나고부터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새벽 일찍이 서대문에 가서 전차를 타고 마포종점에 가서 감자 두 자루를 떼어다가 남대문 시장에 가서 팔면 보리쌀 한되 살 정도의 이윤을 벌어 온 식구가 보리죽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감자포대를 이고 지고 다니시는 버거운 일이 안쓰러워 아버지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를 도와주려고 서대문 전차 종점에 나가 엄마의 감자 한 부대를 받아 등에 짊어지고 오시면 늘 엄마 발걸음보다 빠른 아버지가 먼저 집에 도착하셨다. 나는 놀다가 아버지가 짊어지시고 들어오시는 뒤를 따라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항시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 오시면 기도 하시는데 그날도 기도드린 후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 순간에 갑자기 그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지는 청년으로부터 누런 편지 봉투를 받아서 들고 그 안에 있는 하얀 종이 공문을 읽고 나서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시고 “엄마가 오시면 아버지가 회의 참석하러 갔다가 온다”라고 하라 하시며 묵묵히 청년을 따라나섰다. 그동안 그 청년은 간 것이 아니라 동네 어디선가 몰래 숨어 있다가 아버지가 오시는 것을 보고 따라 나선 것이다. 

그날 저녁 때가 다 되어도, 깜깜한 밤이 지나도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 하시다가 몇 번 집에 나와 아버지가 오셨는지 확인했지만,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어머니는 이 생각 저 생각 하시다가 날을 새고 새벽기도를 마치고 신당동 중앙교회에 시무하는 오라버니 목사님께 찾아갔다. 뜻밖에 오라버니도 어제 같은 날 기독교 연맹에서 사람이 찾아와 오라버니를 데려가셨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을 듣고 돌아왔다. 날씨는 아침저녁이 싸늘하고 추운데 감기나 걸리지 않을까 식사는 제대로 하실까 몸도 약하신데 하면서 종로2가에 있는 기독교 사무실을 물어 찾아가 직원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아버지 목사님을 찾아 달라고 울며 호소했다. 직원들은 모두 다 모른다고 말하며 동정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르면 어디서 알겠느냐고, 급사로 일하는 정 대위라는 청년이 화장실 가는 길에 쫓아가 사정하니 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이에 호텔이나 교도소라는 말을 넌지시 던지고 간다. 엄마는 즉시 알아차리고 서울 안에 있는 호텔을 찾아 반도 호텔에 갔다. 손에는 아버지 내의와 갈아입을 옷들을 보자기에 싸 들고 갔다. 문 앞에서 지키는 사람들과 인민군은 못 들어가게 막았다. 여기에 목사 동무들은 없으니 가란다. 가끔 들려오는 울음소리, 야단치는 고함소리, 소스라치는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로 분위기가 두려웠다. 하는 수 없이 조선호텔을 물어 찾아가 목사님 소식을 묻고 이 옷을 전해달라고 했더니 마구 쌍욕을 하며 문 안에 못 들어서게 한다. 신사들이 계속 잡혀 들어 오는데 호텔 이 층 창문을 통해 매 맞는 울음소리가 들려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머니도 함께 우셨다고 한다. 

 

“나는 죄인이다. 아버지를 잡으러 온 원수에게 아버지를 내어 준 죄인이다.”

 

또다시 독립문 근처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더니 높은 담과 묵직한 문이 잠겨져 있는데 가끔 교도소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다가 매 맞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캄캄한 밤 공습이 뜸해지면 트럭이 와서 사람들을 싣고 홍제동 고개 너머 북쪽으로 끌고 간다고 한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혹시 아버지나 외삼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며칠을 그곳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이 만주와 이북에서 목사들과 교인들을 잡아 감옥에 넣거나 총살하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6.25 남침을 당하던 날 또 만주에서 해방이 되고, 공산화 될 때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살려면 남한 대한민국으로 가야 한다고 울며불며 호소하던 일이 생각난다는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 혼자만 살려고 교인들과 교회를 놔두고 피난 갈 수 없다”라고 하셨다.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눈물의 호소도 옳은 판단 이었다고 이해되고 아버지의 강인한 순교 정신도 존경하게 된다.

8월 23일은 서울 장안에서 목양하시던 목사님들이 공산당에게 붙잡혀 북으로 순교행렬에 들어가셨던 날이다. 오직 교회의 예배를 끝까지 지키다가 교인들과 함께 사랑 하시다가 생명보다 귀한 신앙을 위해, 가족들도 버리시고 교인들도 놔두시고 강제로 북으로 끌려간 것이다. 9월 중순경 북아현동 적산가옥에 있는 정치 보위국에서는 서소문교회 교인 명단을 제출 하라는 통지를 받고 어머니는 여전도회장 이옥순 집사(세브란스 병원 장익진 교수부인)에게 명단을 주어 정리해서 제출하려고 어머니가 동생과 나를 데리고 찾아갔다. 어머니는 정치 보위국에 도착하면서 말씀 없이 우시더니 “창길아 창림아, 너희들이 문밖에서 놀다가 두 시간 지나 어두워도 엄마가 안 나오면 둘이서 먼저 집에 가거라”고 하셨다. 30분쯤 후에 엄마는 정치보위부에서 나오자마자 우리 형제를 꼭 끌어왔으며 눈물을 닦으셨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될까 봐 굉장히 걱정하셨다고 한다. 9.28 환도 후 들은 소식에 의하면 공산당이 서울을 계속 점령 했다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교인 명단을 제출하라고 했단다. 북한에서 했던 그것처럼 말이다.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섭고 거짓말을 잘하는 이중인격자인지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은 모이면 밤늦게까지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며 기독교를 아편 같다고 비방한다. 나의 아버지 김동철 목사의 동정은 북괴 간첩으로 남한에 귀화한 오기환이 납북인사 월북자들의 최후 ‘아오지의 한’이라는 동아일보 칼럼 10호에서 “납치 인사들 가운데는 저명한 정치인들만 아니라 학자, 과학자, 문화예술인, 종교인들 각계각층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 중 저명한 종교인으로 구자혁, 남궁혁, 어택관, 박헌명, 한치 명, 송찬근, 방한, 김동철, 기 규모가, 유한주, 박상건, 장덕로, 이건, 송 택용, 김유연 등 백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함으로 밝혀졌다.

 “남궁혁, 박상건, 장덕로, 어택관, 이건, 송 택용, 박현명, 김유연, 김동철, 주재 명 등 60여 명의 종교계 납치 인사들은 50년 12월 10일 압록강 연안인 만 포 부근까지 당도하여 만 포 30리 못미처 있는 쌍호리 근방의 다 헐어빠진 농가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 무렵 발진티푸스라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의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맸고 김동철과 주재 몇 등 오륙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오지의 한 11호) 

내가 철이 들어가는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워 많이 울었다. 아버지를 부르고 싶어 남산에 혼자 올라가 아버지를 크게 부르며 울었다. 전능 야외예배 때 아버지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울어 주위 온 교인들도 따라 울음바다가 되어 굉장히 미안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죄인이다. 아버지를 잡으러 온 원수에게 아버지를 내어 준 죄인이다. 나 혼자 지켜보는 자리에서 원수가 아버지를 끌고 가셨다. 마지막 떠나시며 하신 말씀 엄마에게 “아버지가 회의 마치고 온다고 해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시고 훌쩍 떠나신 아버지.  6.25가 돌아올 때마다내 나이 팔십이 넘어가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께 죄인이다. 몰라서 원수에게 아버지를 내어주었다. 6.25는 우리 집에 두 기둥을 뽑아간 비극이었으며 폭삭 가라앉은 지붕처럼 우리 가정을 망가뜨렸다.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어도 난 여전히 아버지께 불효자식이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아들들에게 바른 아버지로 기억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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