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라는 말은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남겨 놓은유명한 말입니다. 원래는 ‘나는 생각한다’ 앞에 ‘나는 의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자신의 실존 자체도 의심하여 생각해보니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고 그 생각하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나’ 이더라고 데카르트 나름의 ‘존재론’에 대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심오한 철학적 의미보다는 편리한 하나의 재미(?)있는 말장난이 되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 감정에 중점을 두었던 ‘장자크 루소’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했고, ‘베랑’같은 행동주의자 들은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으며 유명한 “이방인”의 작가 ‘까뮈’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자신들의 ‘존재론’을 펼쳤습니다.
현대의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에서의 ‘존재론’은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클릭 한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 등 이제는 인터넷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지경의 우리의 현실을 잘 꼬집어주는 문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런 말들의 배경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섞여 있는 것도 무시 못 할 것입니다. 저는 심오한 철학자는 되지 못하지만 나름의 ‘존재론’에 대해 요즘 고민하고 있습니다.
심방을 다니면서 하루에 5끼를 먹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가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위의 철학자 들하고는 수준 차이가 엄청나지요?). 나의 인간성, 나의 인격, 나의 사람됨, 나의 기독교인 됨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나의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자기 성찰이 우리 인생 가운데 꼭 한번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미국 땅까지 이민해 와서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쁘게, 고되게 살고 계십니까? 나의 존재론은 과연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적 존재론은 “나는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가치는
물질도, 소유도, 명예도 그 어떤 것도 아닌…”
이 말은 더 쉬운 표현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또 다른 이웃들과 좋은 관계 속에 있다, 고로 존재한다.” 는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 그리고 그 후 절대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가치는 물질도, 소유도, 명예도 그 어떤 것도 아닌 관계일 것입니다. 관계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만이 참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 존재의 의미가 현대인들의 특징인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경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벌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 등의 수준에서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하나님과 또 이웃과 깊은 관계 속에 있다. 고로 존재한다”의 한 차원 높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야 그 인생이 참으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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