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내가 축구를 그만둔 사연이 있다.
몇 년전 축구를 하다 공이 날아와 내 눈을 강타했다. 콘택트 렌즈를 낀 눈인데 공에 맞는 순간 렌즈가 찢어졌고 눈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힘들게 렌즈를 뺀 이후에는 통증은 사라졌다. 그렇게 삼일을 보내고 주일 설교를 하는데 예전과 같이 설교 원고가 잘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공에 맞은 눈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왜 갑자기 눈이 나빠 졌을까 의아해 했다.
그날 이후 눈에 심한 통증이 동반 되면서 눈이 심하게 충혈되는 것 아닌가… 응급으로 병원을 찾아갔더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두 눈을 수술 하게 되었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로 지낸 적이 있다.
몇 달이 흘러 눈은 거의 완치가 되었고 그 눈을 가지고 또 축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전과 같이 잘 뛰 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공이 오면 약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 몸을 움츠리는것 아닌가, 생각은 열심히 뛰 는것 같은데 몸이 자동으로 움츠러든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눈을 다친 이후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생각은 아무렇지 않고 그냥 예전과 같이 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무서워하는 듯 움찔한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 없이는, 죽어지는 고통 없이는 인간의 육체는 자기중심 이라는 것을…
생각과 감정이 마찰을 하는 것같다. 이성은 괜찮아, 더 뛰어, 지시하는데 감정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상처를 크게 받으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감정조절이 잘 안되어 힘들어 한다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육체적 고통 으로 만 이런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처를 받으면 감정조절이 잘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오래 전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고소를 당했고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당시 정말 많이 힘들었고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 당시 내가 무엇 때문에 고소를 당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또 나를 고소한 분을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세월이 만들어 준 것 같다.
어느날, 나는 나를 고소했던 그 분과 식사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분을 보는 순간, 20여 년 전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그분의 모습이 내 머리에 다시 나타나 감정이 솟아올랐다. 머리로는 다 용서 했고 이해가 된다. 그런데 심장이 다시 벌렁 대고 맥박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억제하려 애를 썼지만 잘 안 됐다. 도대체 20년이 넘게 용서를 외쳤는데 또 다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었는데 왜 몸이 20년전 그 때 그 모습으로 반응할까…
진정 용서가 된 것일까? 사람들이 말을 한다. 그건 온전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치유가 안 된 것일까?
치유의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 치유에 대한 책도 저술했다. 과거에 쓴뿌리를 없애는 방법도 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때 받은 상처를 다 고백하고 어루만져 주셨던 체험도 했다. 그런데 왜 심장이 빨리 뛰고 몸에 열이 오를까? 이론적으로 이성적으로 다 아는데 지금 내 감정이 조절이 안 된다.
이성이 감정에게 한마디 했다. “다 용서된 것이야. 왜 과거에 상처를 또 들춰내니… 그런 마귀의 속임수에 속지 마. 다 끝난 거야.” 그렇게 마음을 안정 했지만 뭔가 모를 억울함과 분노가 100%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표정도 밝게 하고 다 용서한 사람같이 손도 잡고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나의 감정은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본다.
요즘 교계 일을 하다 보니 참 서로 생각이 달라 부딪치는 일이 가끔 있다. 잘해보자고 하는 일인데 자존심 싸움까지 한다.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많이 상한다. 하지만 목사가 되어 성도들에게 져주라고, 양보 하라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설교 했다면 당연히 말씀을 외친 목사는 더더욱 주님의 말씀대로 져주는 일을 실천해야 하고 또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게 목사 된 본분 아니겠는가…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말씀 박사 들이다. 분명히 용서도 알고 사랑도 알고 이해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 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세월 외쳤던가, 더욱이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상하고 왜 분노가 남아 있고 왜 흥분이 되는가.
남들은 말한다. 왜 싸우냐고, 더욱이 새까만 후배하고… “그만 덮어 둬, 용서해, 이해해 주면 되잖아…” 옆에서 충고까지 해 준다. 맞다, 싸워야 할 이유도 없고 싸워서는 안 되는 사명을 받은 자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용서 했고 그래서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도대체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는데 감정의 분노는 여운을 남겨 놓고 있다.
나는 왜 그런지 이 사실을 알았다. 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지 어렴풋이 마음에 알 것같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없이는, 죽어지는 고통이 없이는 인간의 육체는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내 힘으로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기보다 먼저 자기 감정까지 죽어지는 십자가 훈련이 필요하여 인생이라는 길을 걷게 하신 것 아닌가 여겨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믿음의 훈련이 없이는 인간은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모두가 예외 없이 ‘내로남불’ 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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