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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9월 그동안 뉴욕을 떠나서 중국이 옌지라고 부르는 연길과 용정, 대한민국의 서울과 부산,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곳 대뉴욕지구한인목사회 주관으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임진각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회로 다녀왔다.
이 계획은 목사회의 회장 이만호목사가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다. 독일의 통일도 독일의 성 니콜라이교회의 월요기도 모임에서 시작되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하나의 나라가 된 것이다. 장벽은 1961년에 세워진 후 동족간의 수많은 비극과 희생자를 남기고 1989년 11월19일에 무너졌다. 국민들이 장벽을 허무는 감동적인 장면을 온 세계가 뉴스로 보았다.
우리 뉴욕에서도 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하면 이 또한 통일을 위한 한 작은 모퉁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순간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들 뉴욕의 목사들이 드리는 이 작은 기도가 통일의 작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시멘트 바닥의 한 작은 틈새에서 풀 한포기가 틈을 뚫고 나와서 꽃을 피우고 시멘트 바닥이 풀이 자라는 힘으로 들려지는 것을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한포기 풀도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와 시멘트 바닥이 들리는데 하물며 뉴욕목사회의 작은 기도가 어떤 힘을 발휘할지 누가 아는가?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른지는 주님 만이 아실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필자도 아주 썩 좋은 건강은 아니었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 평양을 통하여 백두산을 방문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하므로 중국쪽의 연길을 통하여 백두산 정상에 올라 기도하기로 하였다. 그곳에는 백두산 천지를 보려고 찾아온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우리들 뉴욕에서 간 목사들은 정상에 오른 그날 비가오고 안개가 걷히지 않아 백두산 천지의 파란물은 내려다보지 못했지만 주님께 통일을 위한 기도 만은 확실히 드리고 내려왔다. 아쉬움 속에서 다시 한번 백두산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다른 계획이 연달아 있어서 사진만 찍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백두산 정상에서 드리는 통일기도였으므로 주님도 우리들의 마음을 아셨을 것이다. 이 기도가 씨앗이 되었기를 바란다.
필자가 이 기도여행에 참가한 이유가 있다. 필자도 남북이 통일이 되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로 부모님을 따라 살던 모든 것과 어머니에게는 친정의 모든 가족을 뒤에 두고 공산화가 되는 북한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내려온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을 버리고 나를 비롯한 나이어린 우리들 자녀를 데리고 걸리고 업고 해주까지 왔다. 거기서 일년인가를 기다리며 서울로 우리를 데려갈 안내자를 찾는 등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어 해주 앞바다와 임진강이 만나는 어구에서 물이 나간 썰물 때에 피하여 임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을 건넜다.
그때 안내자의 잘못판단으로 남한쪽으로 거의 다 왔는데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버리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남한의 경비하던 사람들이 우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로프를 던져주어 잡고 살았다. 본인은 그때 물이 얼마나 빨리 들어오는지를 확실히 보았다. 그때의 밀물이 밀고 들어오던 모습과 어른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광경이 아직도 필자의 기억 속에 두려움으로 남아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때 생명을 걸고 그곳 바다를 건넜다. 그때 그곳을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나의 할아버지, 친정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강화도 공원묘지에서 보았다. 나의 첫째와 둘째 남동생과 같이 그곳 묘지에 갔는데 큰동생이 내 눈앞 맞은 편의 오른쪽 편 강이 임진강이고 왼쪽편은 해주 앞바다라고 말해주었다. 임진강과 해주 앞바다가 만나는 곳, 그곳을 통하여 우리가 피난왔다고 손짓으로 말해주었다. 날씨가 맑으면 그곳 북녘의 모습이 잘 보인다고 한다. 그곳 묘지는 아마도 삼팔선 넘어 이북이 가장 가깝게 잘 보이는 그곳에서라도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묘지를 쓰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는 친정 모든 식구가 이북에 고스란히 있다. 외할아버지가 모든 식구는 한데 모여 살아야한다고 주장한 분으로 그래서 아무도 내려올 수없었다. 그런 이유로 본인의 친정 집에서는 아무도 이북의 고향이야기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어머니가 우시기 때문인데 단지 어린시절을 같이 지냈던 어머니의 사촌 이모님하고만 마음놓고 그곳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는 피난 내려오면서 친정에 들려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이 오래갈 줄은 모르고 잠시 피했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로 떠나는 인사를 했었다.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남북한 정부가 만난다는 소식이나 가족상봉한다는 소식이 그저 먼 이웃의 소식이 아니다. 그들의 친척이 내 친척같기 때문이고 그들의 만남이 나의 만남같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였건 가족들이 만나는 시간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것은 본인과 같이 그곳에 가족들이 있거나 아니면 이북에 납북되어 끌려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관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에는 천지에서 시작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의 두 강이 흐르는데 두만강이 더 나에게 다가왔다. 두만강이 있는 용정이나 연길은 일제 때 한국에서 그곳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살고있는 곳이다. 아직도 고스란히 살며 연길은 한인이 50%이상으로 간판이 먼저 한글로 써있고 밑에 중국어로 쓰여졌다.
한인들의 문화전통도 유지되고 이곳 뉴욕에서 쓰고 있는 한국말, 사투리말도, 오랜 전통을 가진 한국학교도 많은 책도 있었다. 교회도 있었는데 그 당시 성결교,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기독교 교단들이 구별없이 힘을 합쳐서 일을 했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독립운동, 자손들의 학교교육 등 일도 같이 했다.
그곳 용정에서 한인문화도 교육도 고스한히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학교도 있었다. 이름만 듣던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보았고 그가 살던 집과 다니던 학교와 그의 시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1941년에 쓴 시의 일부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 용정은 본인이 좋아하는 책 박경리의 토지의 배경이다
이제는 용정이나 연길 등 그 이름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그곳에는 한국이나 미국등에서 선교하는 한인선교사가 많다. 뉴욕에서 본인은 그곳 한인은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가진 그들로 만났는데 거기서 우리는 그들이 유지하려던 잘 보존한 유산을 본 것도 큰 이익이 되었다..
주님께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한인들이 소원인 남북통일이라는 말이 실질로 다가올 수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생각보다 속히 주님께서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작은 기도 모임이 어쩌면 크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된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많은 분들이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데 본인은 이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서울로 와서 제주도에 갔다. 서울은 이제는 혼자나가면 미아가 되기 딱좋게 달라져 있었다. 멋진 고층 건물들이 수도 없이 많이 늘어서 있고 그곳의 한인들은 모두 다 이쁘고 잘나고 좋아보였다.
이 큰 축복을 받은 우리는 그냥 있으면 안되고 이런 충격적인 엄청난 물질의 축복을 주신 주님께 보답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 한인 크리스천들이 보답하고 있다고 듣는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전세계에 수만명의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한국이고 농담이 아닌 참말인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종족을 위한 성경책이 한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어진다는 것도 들었다. 이렇게 할 수있는 축복을 우리는 늘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는 나라들이 문자로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읽을 수있다면 좋은 일이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종족이 선교가 안되어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성경을 글로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듣고 있는 사실이다. 130년 전에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이런 엄청난 기적의 열매를 맺었다. 눈물로 감사해야 될 일이다. 그리고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는 이제는 국제도시였다. 국제공항이 된 제주공항을 통하여 들어온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 수많은 한인들, 품질이 좋은 물건, 사람들 마음들도 너그럽고 친절했다. 한라산 에서 뉴욕에서 온 목회자들은 남북한이 통일되는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를 드렸다.
주일 나는 큰 동생내외가 출석하는 충현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수많은 교인들이 주일 날에 예배드리러 물밀처럼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감동했다. 다른 동생이 출석하는 어느교회는 가족이 많지 않은 교인들의 장례를 위하여 권사님들이 장례위원으로 봉사한다. 내 둘째 올케도 장례위원으로 봉사했는데 장례의 모든 순서를 봉사했다. 미국의 장례방식과는 좀 달랐지만 가족들에게 크게 위로되었을 것이었다.
임진각에도 다녀왔다. 그곳은 예전보다 더 개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임진각에서 분단된 나라의 모습을 볼 수있었다. 그곳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기차를 보았다. 언젠가 그 열차가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남쪽으로 북쪽으로 달릴 날이 올 것을 생각해 본다. 더 이상 달리지 않는 기차는 언젠가는 기차길이 수리되고 연결되어 멋진 기차가 남북한을 달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바람이고 기대인 것이다. 끊어진 다리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명명되어진 그 다리도 언젠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할 날이 올 것이다. 기차가 달리는 것같이 더 이상 남북한이 서로 오갈 수없는 38도 선이 영원한 DMZ비무장지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곳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을 생각해본다. 언젠가는 그날을 올 것을 바라면서.
오랜동안 430년을 주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을 받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더이상 힘들어 어떻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억압과 고통의 소리를 외쳤다. 여호와께서 듣고 그들의 조상과 오래전에 한 약속이 생각났다. 모세를 부르고 출애급을 시작하셨다. 출애굽의 시작이고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이었다.
아직도 많은 나라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남북한의 삶의 차이가 심하다. 마음놓고 주님을 섬길 수도 없는 상태에 있지만 언젠가 통일의 그날이 오면 우리 모두가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그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이 서로 만나 안부를 묻고 손을 잡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번에 뉴욕의 목사회가 이룬 통일을 위한 기도여행이 열매맺기를 바란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것을 몇몇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정말로 주님이 역사하실지 모른다” 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기도는 그만큰 간절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많은 다른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통일의 그날을 위해 드리고 박해를 피해 떠나온 사람들의 인구 수가 해가 지나면서 늙어 줄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주님께서 남북한의 닫힌 문을 여시는 역사를 해주시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기억하신 주님께서 우리들 한인들의 기도와 오랫동안 가족과 헤어진 우리들의 애통과 슬픔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주님은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때가 되면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번에 통일을 위한 기도 여행에 다녀 오면서 작은 희망을 지니고 왔다.
주님께서 언젠가 나의 이 작은 소망에 응답해 주실 것을 바란다. (끝)
김금옥 목사(에버그린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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