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May 20, 2024   
서로 다른 행복관 

08/11/23       한준희 목사

서로 다른 행복관 


같은 또래의 친구같은 목사를 만났다. 서로 살아온 과정이 첨예하게 다르지만 같은 목사라는 것, 동시대에 근접한 동네에서 공부하였다는 점,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친해질 수 있는 동기가 된 것 같다. 친해지다 보니 사모님들과도 만나게 되었고 같이 식사하면서 지나온 목회에 대한 이야기로 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2년 가깝게 지내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허물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농담한 마디 한 것이 친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한 것 같다, 그 말이 그렇게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가 하는 생각은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말 한마디에 친구 사이가 깨진 것이다. 그래도 목사인데 헤어졌다 할지라도 어쩌다 만나면 인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예 인사도 안 한다.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인사도 안 할 정도로 등을 돌렸는가  의아하기만 하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뭐가 그렇게 섭섭한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섭섭한 것이 없단다. 그냥 자기가 오해를 했고 다 자기 성격 탓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자기 책망만 한다. 겸손한 것인지, 교만한 것인지 도대체 갈피를 못 잡겠다. 왜 인사도 안하고 지내겠다는 건지 이해도 안 되고 정리도 안 된다.

그런 태도에 나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도 없고, 헤어진 사람 역시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 생각이 옳은 대로 살고 있으리라 본다. 서로 이해가 안 되고 생각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서로 자기 나름대로 긍지를 가지고 잘 산다.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이냐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 생각대로 산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인 것 같다.

지난해와 올해 중남미 여러 나라를 선교 여행 차 다녀보았다.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이 일상화된 그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내 기도 제목에서 끊어지질 않는다. 그것이 동기가 되었는지 자꾸 그들을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픈 것이 나의 요즘 삶에 목표이다.

그런데 다녀온 후에 느끼는 점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오래 내 머리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열악한 삶에 자녀들이 7-8명씩 키우며 삶에 지친 젊은 엄마들, 개와 돼지, 닭들과 어울러서 뛰노는 놀이터 하나 없는 어린애들의 삶, 어려서부터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산속에서 사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아이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렇게 살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조금도 불편함없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물었다.“뭐 불편한 것 없으세요” 그들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말이다. “여기 너무 좋아요, 애들 때문에 행복해요”

도대체 뭐가 만족스럽고 행복하단 말인가, 난 그들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도울까 찾아왔는데 그들은 불편함이 없단다.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불편할 것이라 여기고 찾아가는 선교가 너무 선교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해도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행복은 환경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자기 생각과 만족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전 목회가 어려워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목회라는 사명보다 먹고 사는 것도 무시 못할 사명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남들은 먹고 사는 삶을 뛰어 넘어 목회를 잘 감당하는데 난 삶이란 문턱에 걸려 허덕이는 모습이 처참하게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돌이켜 보니 그때가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일 지금 그런 어려움이 닥친다면 아마도 여유로움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 고난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국 고난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좌절했던 이유는 생각이 모자라고 만족함이 뭔지를 몰랐던 미숙한 생각 때문이었기에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남자들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군 생활이라고들 하는데 그 어려움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런 인생에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듯이 현재의 고난을 어떤 생각과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에 만족과 행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늘 자기기준으로 남을 판단한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살어, 저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면서 어떻게 살까, 왜 저 친구 성격은 저 모양일까, 왜 저 사람은 불평불만이 많을까, 다 내 기준에 의해 남을 판단한다. 불쌍한 사람, 못된 사람, 한심한 사람, 교만한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내 수준에서 그들이 불쌍한 것이지 그들은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뭐라 말해야 옳다고 하겠는가, 다 자기 수준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누가 어떻게 평가한단 말인가,

남을 평가하는 나도 남들이 볼 때 한심하다고 보여지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 한심한 것을 가진 내가 그것 가지고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 

뭐가 옳고 뭐가 틀린 것인지 결국 인간은 인간을 평가할 수 없는 존재임이 확실한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살고 있기에 행복도 그 사람에 의해 평가되는가 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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