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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목사님의 아내로 목사의 어머니로

06/09/23       김창길 목사

평생을 목사님의 아내로 목사의 어머니로


6월 셋째 주일은 아버지의 날이다. 아버지 하면 나는 먼저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가 계셔서 아버지가 계셨고 어머니가 계셔서 오늘날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1900년생으로 생존해 계신다면 133세이시다.

관북지방에 살인마 같은 가뭄과 흉년이 연속되자 외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고향 성진을 떠나 간도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때 철모르는 코흘리개 작은 소녀였다. 외할아버지는 낯선 땅 개척자로 통나무를 잘라내 기둥을 세우고, 돌멩이와 흙과 지푸라기를 반죽하여 벽을 치고, 나뭇잎과 풀잎을 엮어 지붕에 올려 통나무 집을 지어 사셨다. 어머니는 용정에 있는 주일학교에 다니다가 캐나다선교사의 인도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를 받으실 적에 아직 이름이 없이 ‘갖나’로 불렸단다. 캐나다 선교사는 이름없는 소녀에게 세례명을 '마리아'라고 지어 주셨다.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이름을 받아 평생 마리아 로 사셨다.

그후 간도 명동 학교 중학부를 졸업한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졸업 후 용정감리교회에 간사로 취직되었고 이화춘 담임목사와 양주삼총리 사의 장학금을 받아 경성에 있는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에 유학하여 1926년 12회 본과 졸업생이 되었다가 전액 장학금을 받았으나 생활비가 모자라 어머니는 신학교 냉천동 아래 조그만 셋방을 얻어 하숙을 치고 남의 빨래를 빨아주고 바느질을 하여 아버지의 학업을 뒷바라지하였다. 만삭인데도 화신백화점 뒤에 있는 태화사회관이 운영하는 한국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집에 와서 출산하였다. 신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만주에 돌아가 조선족 선교를 위해 목회하실 때 아버지가 일경에 잡혀 감옥살이할 때나 팔로군의 만행이 한참 자행되던 불안한 시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목회를 위해 꿋꿋이 잡화가게와 목장을 운영하며 경제적 부담을 담당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보며 아버지를 설득하여 신경 입선정 교인을 인솔하여 귀국하여 만주 교포를 중심으로 하여 서울 서소문 교회를 개척하도록 내조했다. 생활이 구차할 때 어머니는 두 팔 걷어 남산공원에 달구지를 끌고 가서 밥장사하여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셨다.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나자 북에서 공산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역시 아버지에게 피난 가자고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만주서 피난 나올 때 두고 온 교우 몇 가정 때문에 많이 괴로운데 이제 또 나만 살려고 교인을 두고 떠나갈 수 없으니 정 피난 가고 싶으면 아이들 데리고 며칠 나갔다가 오시오”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공산당이 들어오면 먼저 목사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우리는 국군 편으로 가서 살아야 합니다”고 울며 매달렸지만 벌써 아버지는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엄마의 말을 안 듣고 피난을 안 가시더니 8월 20일 기독교 연맹에서 회의한다고 사람이 찾아와 끌고 가더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수소문 끝에 반도호텔, 조선호텔, 서대문 형무소 등을 찾아 발이 부르트고 못이 박히도록 쫓아다녔지만 헛것이었다 서울 시내 목사님들은 정치보위부에 이끌려 밤에 자동차에 실려 북으로 끌려가셨다. 6·25 동란으로 아버지는 51세 어머니는 50세, 아들 6명을 어머니에게 남겨두고 떠나가셨다. 오랫동안 아버지 소식을 기다리시다가 ‘죽음의 세월. 아오지의 한 10호, 11호’에서 아버지가 압록강 근처 만포리 에서 순교하신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 기록은 북괴간첩 오기완이 자수하여 신문에 연재한 기사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못다 한 여섯 자녀 교육을 위해 멸시와 천대와 억울함을 당하며 교회당에 가셔서 울며 불며 기도하여 우릴 키우셨다. 큰아들과 내가 목사가 되고 셋째 아들은 신학을 했지만, YMCA에서 일하다 은퇴했다. 필자가 목사가 된 후 사택에 찾아와 상담하는 여학생들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뒷문을 열어 놓고 떨어져 계셨다. 목회자는 항시 여인을 만날 때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용산교회 부목사인 김정국 목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가 어머니가 저에게 목사님이라 부르고 존댓말을 쓰는데 놀라면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어떻게 존대할 수 있느냐고 하기에 형제 중에 목사 아들에게만 존대어를 쓰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이라도 목사를 존경하고 아들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내가 설교를 할 때 어머님은 앞자리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고개를 끄떡이고 가끔 아멘 하신다. 설교 끝난 다음에 조용히 내게 와서 은혜 받았다고 하셨다. 정말 잘한 설교가 아닌 것 같은데도 말이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어머니는 전도지를 들고 절룩절룩 거리는 걸음걸이로 남대문에서 서울역전을 가시는데 신경통으로 쑤시는 다리이기에 남대문 지하도를 내려가지 않으시고 행담도로 마구 건너가시는 것을 교인들이 보고 내게 전해 주곤 하였다. 어머님에게 전도하시는 것 좋으시지만, 교통사고 나면 어떡합니까 어머니 대신 아들이 목사로 전도하는데 다 어머니가 낳고 기르신 아들이 하는 것이니 어머니가 전도 안 해도 어머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려도 어머니는 주님 앞에 갔을 때 ‘아들이 전도한 것 말고, 네가 전도한 것이 몇 명이냐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아들과 어머니의 전도는 각각 다르다고 하셨다. 서울역에서 전도하실 때에 대부분은 감사히 전도치를 받긴 하지만 “늙은 할머니가 전도하는 것을 누가 믿어요? 젊고 유식한 사람이 전도해야지” 라고 어머니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 어머니는 “그동안 자식 키우느라 하나님 위해 한 일이 없으니 이제 나도 하나님 앞에 갈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냐” 하시면서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으셔서 자식들은 늘 불안하고 노심초사하곤 했었다. 요사이 평생 아버지의 가난했던 목사의 사모로,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린 어머님의 신심,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경륜과 지식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셨던 어머님의 모습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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