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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의 독특한 심성(心性)

07/02/18       허경조 장로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성(心性)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성(心性)

우연히 신문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다. “양주향교는 3월26일 오전 유양동 소재 향교 대성전에서 공자탄강 2569주년을 맞이하여 춘기 석전대제를 봉행했다.” 한국어로 표현됐으나 몇 몇 단어는 뜻이 궁금하여 google하여 이해하였다. 탄강(誕降) 이란 생일의 극존칭이며 탄생보다 더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석전(釋奠)이란 전통적으로 나라에서 주관하는 의식으로 성인과 뛰어난 선비들께 올리는 제사의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석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에는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에 문묘를 모시고 국가적인 행사로 석전을 봉행했으며 현재까지 이르러 이번 제사도 현역 시장과 시의회 의장이 주례자가 되어 그야말로 정성 드려 거행했다. 그런데 공자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어떠한가 궁금하여 이를 조사해 보았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공자가 죽어야 중국이 산다’며 공자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공자의 사상을 공격하고 공자묘 유적을 파괴하기도 했다. 중국 산둥성 취푸(곡부)의 공자묘 옆에 세워진 대규모의 공묘는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동양사상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성인에 대한 경외감이나 경건함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공자의 대한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다. 공자의 제사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성 취푸 공묘의 대성전이 아니라 한국의 서울 성균관 대성전이나 지방 향교에서 열린다. 중국인들은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가를 이상하게 여기며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훔치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고 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의 사상적 후예 중 가장 원리주의적인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주자의 유교를 받아들였다. 주자의 유교 해석과 다른 언동을 보이는 자는 사문난적이라 하여 가차없이 징계를 가했다. 주자 외에 다른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른바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정권과 결합된 강력한 통치이념으로 작동했던 공자의 유교, 주자의 유교는 자유민주주의가 만개한 21세기에도 살아남아 한국인 정신의 한 원류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자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적에 그 당시 목회하시던 조부의 가르침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한국인은 선교사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미 중국에서 들여온 성경을 읽고 자생한 신자가 있을 정도로 신앙적인 열심히 대단하였으며 기독교 선교 역사상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이런 사례는 없다는 것. 또한 소련과 동구 유럽 등 많은 국가들이 채택했던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소련과 동구의 해체와 더불어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지만 이 땅의 절반인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김일성주의와 결합해 아직도 북한 주민을 옥죄며 건재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이면서 이를 극단화시키고 원리주의로 치우친 김일성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다른 지역에서는 평범한 종교나, 문화, 이념이 한국 땅에만 들어오면 극단의 성질이 강조되고 원리주의화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견 이런 태도는 지극한 정성과 열심 있는 모습으로 좋게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극단의 성질이 강조되고 원리주의로 치우치는 물결 속에서는 타협과 대화와 이해가 사라지고 자신만이 옳고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무조건 틀렸다는 고집과 독선이 난무하여 국가와 민족이 하나로 화합됨을 방해하는 모습들이 현재까지도 ‘태극기 부대’와 ‘촛불 부대’로 우리 앞에 보여 지고 있지 아니한가. 이제 동일한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자. 필자는 현재 한국 장로교단 내에 정확한 교파 수를 알지 못한다. 한국인만의 독특한 신앙적 열성은 전국의 교회수가 전국의 편의점 수 보다 앞선다는 통계수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교파 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혹자는 일제 강점기 시에 신사 참배로 인한 신학 사상의 노선과 이해관계를 그 이유로 들기도 하나 사실은 한국인의 심성에 기인한 극단적 성질과 원리주의적 독단성이나 혹은 교단 내에서 목사들 간에 갖는 정치적이고 이해 계산적인 세력에 의한 싸움의 투쟁 결과는 아니겠는지 다시 한 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단 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지 교회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성장할 시기에는 좋게 보이던 열심들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열심만큼의 고집으로 변하여 목사와 장로들 간에, 장로와 안수집사들 간에 자신만의 독선과 고집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노회와 총회에서도, 지역간의 교회 협의회에서도 비슷한 모습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으로 마지막 고뇌의 기도를 올리시기 전 간절히 하나님께 비는 말씀을 보게 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 20 - 23 )

 

” 필자가 본 글을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곳에서의 20년 이상의 미국 직장 생활에서의 결론이다. 그동안 여러 모습의 문화적 차이를 깨닫는 경험을 하였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항일수록 학창 시절에 debate 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의 이에 대한 대화 모습과 쟁점에 대한 접근 모습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다. 우리 교회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함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또 예수님을 사랑하심 같이 교회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함이다. 이 말씀은 진리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사명은 과연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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