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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모델로, 학교 설립하는 교육자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회복지사로, 복음주의적인 에큐메니칼 지도자로 (2)
추양(秋陽) 한경직 (1902-2000)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위해 소년 경직을 유교 가문에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서당에 가지 않고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 들어가 예배와 한글 교육, 신학문을 배우게 하셨다. 졸업 후 남강 이승훈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 장로가 교장으로 있는 오산학교에 들어가 민족을 위한 애국정신과 신앙교육을 받았다. 숭실대학 과학부에 입학해 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 북장로교 미션스쿨 엠포리아 대학에 들어가 Liberal Arts를 전공한 후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의 성장 과정은 기독교 교육이 전부였다. 경직의 첫 목회 시절에 신의주 제일교회 전도사 초빙과 함께 숭인상고 교목으로 초빙받은 것을 보면 기독교 교육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경직 목사는 전형적인 목회자이지 신학자는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38선 이북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목사들과 애국자들의 체포령과 납치가 한창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급하게 주위의 권유에 이끌려 가족을 그냥 남겨 두고 윤하영 목사, 김치선 선생(후일 숭실대학교 총장), 이유필 선생(38선 부근에서 피살)과 함께 신의주를 떠나 남한 서울로 떠나왔다. 서울에 피난 온 교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대광(大光) 중고교와 국민학교를 신설동에 설립했고, 가난으로 인해 낮에 일해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야간 영락상고를 연평구와 관악구에 설립했다. 여성 전도사 양성을 위해 영락여자신학교를 설립했다. 서울에 숭실대학교를 재건해 잠깐 동안 학장 일을 맡기도 했다. 그의 목회는 교육에 주안점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교육 담당 부목사로 이선영 목사(서울사범대학 교육과 졸업)를 초빙하였다. 경직은 본래 학문적인 학자 기질이 있어 프린스톤 졸업 후 예일대학에 가서 교회사로 PhD를 하고 싶었지만 폐질환으로 포기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 영락동에 있는 천리교 건물을 군정청으로부터 불하받아 신의주에서 피난 온 27명과 함께 1945년 12월 2일에 첫 예배를 드렸다. 처음 교회 이름은 베다니전도교회였다. 한경직 목사는 실향민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새 출발의 감사로 간절한 설교를 하였다. 평안도에서 피난 온 성도들에게 한경직 목사의 설교 소문이 시내에 퍼져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1년 만에 2,000명, 1949년에는 6,000명이 모였다. 영락교회는 대한민국 안에서 획기적으로 부흥하는 교회였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는 누구나 들어도 쉽고 간편했다. 복음적이며 교인들의 애환을 만져 주었다. 설교자는 겸손하고 정직했으며 간절했다. 한 목사님은 Pulpit Commentary를 사용했다. 그의 설교는 피난민에게 용기와 비전을 주었고, 은혜를 받은 교인들에게 다음 주일을 기다리게 하는 설교였다. 교인이 상상 이상으로 많아지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이 아직 집과 일터를 장만하기 전에 먼저 이북에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성전을 지었다. 당시 서울엔 일제 적산가옥 같은 나무 판자 교회나 붉은 벽돌 교회였는데, 영락교회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단단한 돌로 석조 건물을 지었다. 그 후 성도교회, 해방촌교회, 동신교회 등이 연이어 석조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서울 지경도 엄청나게 커지고 교회 수도 많아져 영락교회는 뒷자리로 밀려났다. 서울 영락교회 목회 4년 반 만에 6·25동란이 터진 지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함락되었다.
서울이 위태롭다고 청년들이 찾아와 한 목사님에게 교회당 구내를 떠나야 한다고 간절히 간구했다고 한다. 강권적으로 김치복 장로, 이창로 장로가 한 목사를 모시고 보린원을 거쳐 청파동에 있는 김성호 선생 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마포 강변에 나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많은 사람들이 배가 없어 발을 구르던 중 이름 모를 뱃사공이 한 목사님을 알아보면서 한강을 건네주었다. 한 목사님은 신의주에서도, 영락교회 사택에서도 교인들의 강권과 협조로 피난 가게 되었다. 6·25 전쟁이 발생하자 정부는 KBS 방송국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한경직 목사의 녹음방송을 녹취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가지 말고 서울을 지킵시다. 곧 국군이 탈환한다."는 메시지였다. 한 목사님의 녹음도 "성도들이 서울을 지킵시다. 국군이 곧 탈환합니다." 이 녹음은 피난 가기 전에 방송국 PD가 녹음한 것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밀려갔을 때도 KBS 방송은 계속 틀어 주었다. 당시 혹자들은 한 목사님이 이미 피난을 가고서도 어떻게 이런 방송을 대전에서 할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당시 방송국은 KBS 중앙방송국 하나였고 시민들은 녹음기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
이 방송은 한 목사님이 피난 가기 전 녹화한 방송일 것이다. 방송국은 전략상 계속 틀었고 국민들은 숨어서 몰래 이 방송을 듣고 안심하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필자도 국민학교 시절 이불 속에서 형들과 함께 이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6·25로 인해 전쟁고아가 많이 생기고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많았다. 영락교회는 보린원을 세워 이들을 교회가 돌보았다. 교회의 사명은 큰 교회를 건축하고 교인이 많이 모여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6·25 전쟁으로 인한 고아나 과부를 직접 돌보고 물질적인 후원과 더불어 집을 마련해 주고, 일터를 잡아 일할 수 있도록 자립 과정을 도왔다. 사회와 정부를 향해 복지의 방향을 제시했다.
한경직 목사는 교단과 교단 연합 사업에도 앞장섰다. 여러 단체가 모이면 이견도 생기고 책임자가 되려는 다툼이 있을 때에도, 한 목사가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농촌교회를 돕는 일에 영락교회가 담당하는 수가 교단이 감당하는 수보다 더 많았다. 영락교회는 자기가 하는 사역을 교단에 이양시켜 재정을 그대로 주어 교단으로 하여금 일하게 했다.
빌리 그래함 집회나 피얼스 집회를 알선하고 통역을 하며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하나로 묶는 일에 앞장섰고, 감투는 사양했으며 서로 연합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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